「Sly & Robbie」 마지막 장으로: 저음을 정의한 남자, 슬라이 던바 별세

「Sly & Robbie」 마지막 장으로: 저음을 정의한 남자, 슬라이 던바 별세

“Jake Savona with Sly & Robbie (2015)” © Vintagesounds(촬영:Lara Merrington), CC BY-SA 4.0, via Wikimedia Commons(변경 없음)


레게를 듣고 있으면 가끔 "이 리듬은 처음부터 세상에 존재했다"고 착각하는 순간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 '당연함'은 누군가의 발명이며, 누군가의 손버릇이며, 누군가의 인생의 축적이다. 로웰 '슬라이' 던바의 부고는 바로 그것을 직시하게 했다. 비트의 이면에 숨어 있으면서 수천 수만 곡에 피를 통하게 한 존재가 문득 사라진다. 음악은 남아있지만, 심장이 멈춘 듯한 고요함만이 퍼진다.


보도에 따르면, 슬라이 던바는 자메이카 킹스턴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가족은 "재능, 혁신성, 그리고 세대를 넘어 계속되는 공헌은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라는 취지의 성명을 발표하고, 깊은 감사와 지원에 대한 말도 덧붙였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자메이카 국내의 정계에서 음악 관계자, 그리고 멀리 떨어진 각국의 청취자들까지 일제히 반응한 것은, 그것이 단순한 유명인의 부고가 아니라 음악의 '기초 공사'를 담당해 온 인물의 퇴장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슬라이 던바를 이야기할 때 피할 수 없는 것이 베이시스트 로비 셰익스피어와 함께한 전설적인 듀오 "Sly & Robbie"다. 두 사람은 단순한 명콤비가 아니다. 레게, 덥, 댄스홀의 리듬의 골격을 녹음 현장에서 계속 갱신해 온 '가동식 규격'이었다. 이른바 "드러머는 뒤에 있는 사람"이라는 상식을 그들은 여러 번 뒤집어 왔다. 드럼과 베이스가 앞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곡 그 자체의 중심을 재구성하여 노래나 기타, 신스가 "그 위에 올라탈 수밖에 없는 기반"을 구축한다. 그런 작업을 그들은 당연한 듯이 쌓아왔다.


음악적인 혁신은 화려한 솔로나 기발한 음색만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슬라이가 위대했던 것은, '어긋남'과 '틈'의 설계에 있다. 레게의 기분 좋음은 뒷박에 있다고 하지만, 뒷박은 단지 늦추면 되는 것도 아니고, 단지 튀면 되는 것도 아니다. 너무 딱딱하면 기계가 되고, 너무 부드러우면 윤곽이 녹아버린다. 슬라이의 드럼은 그 경계를 노려 치고 나눈다. 결과적으로 소리는 가볍게 들리는데, 몸은 저절로 무겁게 흔들린다. 춤출 수 있는데, 깊이 가라앉는다. 레게가 '음향'으로서 덥으로 확장되고, 더 나아가 '거리의 언어'로서 댄스홀로 이어져 간 배경에는 그러한 신체 감각의 번역자가 필요했다. 그리고 슬라이는 그 중심에 있었다.


커리어를 돌아보면 그의 발자취는 놀라울 정도로 넓다. 자메이카 현장에서 쌓은 평가가 결국 세계의 스튜디오로 이끈다. 레게의 틀에 머무르지 않고, 록이나 팝의 거물들과도 교차하며 국경이나 장르의 벽을 당연한 듯 녹여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슬라이가 "게스트로 초대받았다"는 것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많은 협업에서 요구된 것은 '레게 같은 장식'이 아니라, 곡을 성립시키는 리듬의 설득력 그 자체였다. 즉 그는 음악의 표면이 아니라, 뼈대에 초대받았다.


또한, Sly & Robbie는 연주뿐만 아니라 프로듀스 면에서도 큰 영향을 미쳤다. 자신들의 레이블/거점을 가지고, 리듬과 녹음의 사상을 유통시킴으로써 다음 세대의 음악의 토대를 넓혀갔다. 댄스홀이 가속화되는 시대에는 리듬 문화를 지탱하는 '튼튼한 차체'를 준비하고, 그곳에 다수의 목소리가 탑승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었다. 리듬은 단순한 반주가 아니라 도시의 공유 자산이 된다. 슬라이의 작업은 그 공유 자산이 "낡지 않는 규격"으로 계속되도록 갱신과 조정을 계속하는 것이기도 했다.


부고가 보도되자 SNS는 곧바로 '추도의 세션'으로 전환되었다. 먼저 눈에 띈 것은 자메이카의 미디어나 방송국, 문화를 지탱하는 계정들이 잇따라 게시물을 올리고, 공적을 짧은 말로 새겨가는 흐름이다. 거기에 일반 청취자들이 "당신의 비트로 음악을 배웠다", "수천 곡의 배후에 당신이 있었다"는 말을 덧붙여 간다. 재미있는 것은, 곡 제목보다 먼저 "리듬", "그루브", "드럼의 음색" 그 자체가 이야기된 것이다. 보통 추도는 대표곡의 이야기로 이어지기 쉽다. 하지만 슬라이의 경우, 그가 '곡의 척추'였다는 것을 모두가 직관적으로 알고 있었다.


유명인들의 추도도 잇따랐다. 영국의 덥/레게계 DJ로 알려진 데이비드 로디건은 슬라이를 '진정한 아이콘'이라 부르며, 방대한 녹음에 참여한 위대한 드러머로서 애도하는 취지의 코멘트를 내놓았다. 이러한 말이 가슴에 와닿는 것은 슬라이의 업적이 "특정 밴드의 성공"이 아니라, "음악의 언어의 갱신"에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더 나아가 오랜 기간 함께한 아티스트 측에서도 "믿을 수 없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이라는 게시물이 올라와 제작 현장의 인간관계의 깊이가 전해졌다.


자메이카 국내에서는 공적인 추도의 톤도 인상적이었다. 총리가 슬라이를 "소리의 건축가"라고 칭하며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강조하는 취지의 발신이 보도되고 있다. 음악가의 부고에 대해 국가의 리더가 '사운드의 설계자'라는 표현으로 언급하는 것은 그만큼 그의 작업이 국가의 얼굴, 즉 문화 수출의 핵심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레게는 세계에서 사랑받는 한편, 오랫동안 "주변의 음악"으로 취급되기도 했다. 그 편견을 현장의 기술과 성과로 꺾어온 것이 슬라이들의 세대였다.


SNS상에서는 추도의 방식에도 몇 가지 유형이 보였다. 하나는 짧은 "RIP"와 비둘기나 드럼 이모티콘, 그리고 #SlyDunbar 같은 해시태그로 '신호'를 보내는 형태. 또 하나는 구체적인 기억을 이야기하는 장문형이다. "이 곡의 스네어가 인생을 바꿨다", "그 시대의 녹음은 전부 당신의 소리가 난다"는 식으로 개인사로서 슬라이를 새로 새긴다. 더 나아가 연주자 측의 게시물에는 "교과서", "연구 대상", "도달점"이라는 말이 많았다. 동경이 아니라, 기술로서의 경외. 거기에 그의 특이성이 있다.


슬라이 던바의 죽음은 레게의 역사의 끝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가 남긴 '규격'이 얼마나 현대 음악에 스며들어 있는지를 재확인하는 사건이 되었다. 덥의 공간 처리, 댄스홀의 추진력, 더 나아가 팝이 때때로 빌려가는 '어긋남'의 쾌감.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기분 좋음의 원천을 따라가다 보면 슬라이의 그림자가 보일 때가 있다. 앞으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세대가 늘어나도 비트의 문법이 남아 있는 한, 그는 계속 살아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추도의 말을 하나만 '현장 시점'으로 바꿔 말하자면 이렇게 된다. 슬라이 던바는 음악을 화려하게 꾸미는 사람이 아니었다. 음악이 쓰러지지 않도록 지탱하고, 앞으로 나아가도록 밀고, 춤을 계속 출 수 있도록 호흡을 정비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사라진 상실은 크다. 하지만 동시에 그가 새긴 고동은 앞으로도 세계 어딘가에서 계속 울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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